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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박흥주, 박선호 탕탕절 재평가?

category BACKUP/POLITICS 2021. 2. 5. 20:32

10월 26일이면 10·26 사태라 불리우는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사건일입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1인 집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하여 나아갔으며 특히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1972년 10월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 오면서 그 동안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였고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암살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를 암살한 날 이기도 해 역사적으로 의미가 아주 큰 날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1597년 10월 26일에 명량대첩으로 일본 수군을 격파한 날이라고 하네요.

 

 

1920년 10월 26일에는 김좌진 장군이 청산리 대첩으로 일본군을 격파한 날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10·26 사태가 발생한 10월 26일을 일부 사람들은 오히려 탕탕절이라면서 반기고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탕탕절 관련하여 포스터도 이렇게 만들어서 공유되고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전두환 세력이 떼어냈던 3군단장· 6사단장 때 김재규 사진이 다시 걸리기도 했습니다.

 

 

군은 그동안 10·26사태를 일으킨 김재규 전 중정부장 사진 게시를 금기시했는데 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를 통해 ‘군이 정권을 창출했다’는 자부심과 명분을 무너뜨렸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군은 전두환 군부 반란세력이 실권을 잡은 12·12사건 이후 김재규 전 중정부장 사진을 떼어냈고, 그가 거쳤던 부대의 기록물에서도 그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는데, 이렇게 다시 군 역사를 군 일부 세력의 입맛대로 재단하는 것을 방지하면서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지휘관 사진물과 관련한 부대관리훈령을 개정하고 사진을 걸게 된 것입니다. 

 

 

전우용 역사학자가 페이스북을 통해 한 말이 있습니다. 일부 내용을 발췌했습니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다.”

90%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승리한 자의 기록만 남고, 역사가들은 그 기록을 통해서만 과거에 접근할 수 있었으니까요..

인류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지배층만이 문자 기록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피지배층에 관한 사실조차도, 지배층의 기록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피지배층이 일상적으로 겪은 억울함과 고통, 그들의 의지와 희망은 거의 또는 전혀,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과거 역사적 사건들이 재조명 되어 재평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에 탕탕절과 함께 김재규, 박흥주, 박선호 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시선도 많이 게시되고 있어서 공유해 드릴려고 합니다.

 

먼저 김재규 재조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사실 김재규는 5.16 군사 쿠데타와 관련이 없고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던 이종찬 계열의 사람이였다.

  2. 중앙정보부장 취임 이후 남산고문실 폐지

  3. 중정에서 간첩조작사건 없앰 (이전 중정부장 임기 3년동안 70건이 넘던 간첩조작사건이 김재규 재임시절 0건)

  4. 중정에 의한 선거개입 차단

  5.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카톨릭 계열 사제들 방면 (이때 김수환 추기경과 친분을 얻게 됨)

  6. 당시 야권 인사였던 김영삼 지원

  7. 박정희에게 1977년 직선제를 건의하기도 했고 1979년에는 긴급조치 9호의 해제를 건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박정희는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정희와의 사이가 틀어지게된 이유 중 하나)

  8. 1979년 당시 연금중이던 김대중의 외출을 눈감아주어서 김대중이 김영삼측 단합대회에 참석할수 있게 만들어 김영삼의 전당대회 당선을 도와주기도 했다.

    (바로 이 사진이 김재규 작품이었던 셈)

  9. 10.26 직전, 차지철이 캄보디아 처럼 전부 밀어버려야 한다라고 주장. 이 말을 듣고 박정희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 있던 김재규에게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그렇게 물러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나?"며 면박을 주었다. 그날 김재규는 집무실에 돌아와 수행비서관 박흥주에게 "귀를 좀 씻어야겠다"고 말했다.

     

  10. 강압수사 금지 조치, 기구 축소, 해외정보업무 중심으로 중정 개편, 부장 판공비 8억 원을 내놓아 직원들 퇴직기금을 제공했다 

  11. 아버지가 세운 사학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12. 10.26 일어나기 3개월 전, 고 장준하 선생의 아드님에게 시끄러워질거 같으니 미리 미국으로 피해 있으라는 말을 하였다. (10.26이 우발적이 아닌 의도된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주장)

     

  13. 김재규가 장준하의 가족을 찾아가 "장 선생님은 추락사 한 것이 아닌 정권 차원에서 돌아가셨다"라고 귀띔해줌 (장남 장호권의 증언)

  14. 중정부장 시절에 그의 부모님은 쌀가게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중정부장이니 그의 동생에게 비리에 연루됐다고 하자 건설사를 그만 두라고 한 일화, 건설부 장관 시절엔 그의 무남독녀 딸의 결혼식에 친지들 이외엔 누구도 오지 말라고 한 일화가 있다

  15. 부마항쟁 당시 김재규와 박흥주가 최루가스에 맞아 초주검이 된 어린아이를 구하기위해 노력하였다. (김재규 평전 내용)

     

  16. 4.3항쟁의 주역인 송요찬 장군과 마찰이 있었는데 당시 김재규 대령을 영창을 보내려 했으나 이를 말린 사람이 이종찬 

  17. 그는 최태민의 비리를 파해쳐 박정희에게 보고하였으나 별 반응이 없자 상당히 화를 냈다고 한다. 이후 항소이유서에 이것이 10.26 발생의 계기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18. 10.26 이후 김계원의 증언에 의하면 시해 당일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부마사태를 폭동 진압하듯 무조건 누르면 부산 시민이 다 일어나 봉기한다. 공화당도 차지철이 무서워 대통령께 바른말을 못하고 있다. 이놈을 오늘 없애 버려야겠다."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19. 박정희 시해 바로 전 김재규는 박정희와 김영삼 구속과 관련해 서로 언성을 높힐정도로 싸웠다고 한다. (김계원 증언)

  20.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당시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21. 투옥 이후 재야인사 및 김수환 추기경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하였다.

  22. 유신독재에 항거하는 학생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아서 취직을 포함해 아무 것도 못하는 폐인으로 만드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면서, 이런 방식으로 생긴 '자생적 빨갱이'가 북한에서 넘어오는 '진짜 빨갱이'보다 무서운 존재라며 박정희에게 정책의 시정을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평소에 유능한 인재들이 빨갱이란 이유로 탄압받는 일에 안타까워 하며, 인재들이 잘못된 이념에 빠지도록 몰아가는 사회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생 증언)

 

이렇게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김재규의 최후진술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가지고 와봤습니다.

재판장님, 그리고 심판관님 최후진술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이 잠겨서 제대로 이야기가 될는지 모르겠으나, 최후진술이니까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금번 본인 외에 피고인이 내란죄로 지금 기소가 되고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동안에 합법적으로 수립되었던 민주당 정권이 5.16혁명에 의해서 밀려났습니다. 그다음에 10월 유신은 말하자면은 자기 집 앞마당에서 또 한차례 치르는 혁명이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혁명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했습니다.

 

그리고 금번 10.26 혁명은 이 나라의 건국기념이고 또한 국시일이고, 6.25를 통해서 전 국민이 수난을 겪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바치고 지켜온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혁명을 한 것입니다. 이 혁명이 어떻게 하여 내란죄에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대한민국 전체 국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3700만 명이 갈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회복시키는데 어찌하여 내란죄에 적용되느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10월 26일에 혁명은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집권에 대한 욕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리나 사욕이 아닙니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이 혁명의 결과,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또, 그것이 보장이 되었습니다. 최 대통령께서 권한 대행 시절에 국민 앞에 공약을 하셨습니다. 또, 최 대통령께서는 지금 현직 대통령의 자리를 임기를 다 마치지 않고 도중에서 그만 두시겠다. 다시 말해서 과도적으로 이 정권을 지키겠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과도라고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해가는 과도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이 됐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 긴급 조치 9호를 해제 결의를 했습니다. 이것 또한, 만일, 10월 26일에 혁명이 없었던들 어떻게 이러한 결의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 또한 이 혁명의 성공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또, 이 혁명은 5.16혁명이나 10월 유신에 비해서 그야말로 정정당당합니다. 허약한 자유민주당 정권을 무력하다는 이유로 밀어 치우는 거, 앞마당에서 자기 마음대로 한바탕 혁을 더해서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을, 여기 비하면,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유신 체제를 정면에서 도전을 해서, 유신 체제를 타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완전히 성공을 했습니다.

 

따라서, 10.26혁명이야 말로 역사상에 가장 정정당당한 혁명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혁명을 한다는데 무혈혁명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무혈혁명으로서는 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적에는 부득이, 최소한의 희생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번에 10.26혁명이야말로 최소한의 희생이 불가피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자신의 희생 간을 완전히 숙명 관계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은 대통령 각하께서 희생하지 아니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통령 각하를 잃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이고, 그야말로 이 마음을 아파할 데 어디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신 이후 지금 7년이 경과가 되었습니다만은, 영구히 집권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보장된 오늘날. 20년 내지, 25년은 그것은 이박사 수명을 기해본 것입니다. 최소한 자유민주주의가 회복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가슴 아픈 일이고 하지만은, 그러나 이 나라 절대 국민들의 희생을 막고 하기 위해서는, 결국은 이 혁명을 아니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들은 모두 감상적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또, 감정이 몹시 앞서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례를 판단함에 있어서 감정이 앞서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금번에 저희들이 이 내란죄로서 심판을 받는 것도 나는 그러한 까닭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정은 감정으로, 또 정치 현실은 현실로서 냉정하게 판단하여, 그리게 해서 법은 엄연한 위대한 자세로서 귀결되야 된다. 난 법을 잘 모릅니다만은, 때나 경우를 가리지 않고 공정한 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판례를 매우 중요시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 스스로가 내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가지고 최후 진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대장부로 이 세상에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죽을 수 있는 명분을 하나 발견했다는 것은 너무 나도 죽음의 복을 잘 탄 사람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오늘 죽어서 영생할 수가 있다 하는 일에 자부가 있기 때문에. 나는 조금도 내 생명을 구걸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10.26 혁명을 그 이념과 정신과 그 성공한 결과를 뚜렷이 해놓기 위해서, 법이 허용하는 한 마지막 날까지는 투쟁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말하라고 한다면 5.16도 10월 유신도 범법이 아니라면, 자연히 10월 26일의 혁명도 범법이 아니다 이렇게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투쟁을 한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내가 하지 않으면 10월 26일 혁명이라는 것은 의미 없는 혁명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여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만은, 건국의 이념이요 우리의 몫입니다. 수없이 많은 국민이 희생을 치르고 전체 국민이 수난을 당하고 지켜온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유로든지 간에 이것은 말살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71년 유신과 더불어 까닭 없이 말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여 유신 체제는 국민을 위한 체제가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총신 대통령 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체제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나는 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그러한 의무와 책임은 있어도, 이를 말살 그러한 권한은 누구로부터 받을 수 없고 절대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나라는 모순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특히 체제에 대한 반대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라는 소리가 높아지자, 긴급조치 9호가 75년에 발동이 돼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옥고를 치르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계속 탔고 또 번져나갔습니다. 전국의 지금 팽배한 이러한 상태까지 번졌습니다. 제가 정보부장으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에 의하면, 앞으로 이 유신 체제를 두고 정부와 국민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이 공방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됩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우리 박정희 대통령 각하를 비교를 해보면,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그만둘 때 그만둘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절대 그만두시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방어해냅니다. 많은 희생자가 나와도 자유민주주의는 결코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은 이걸 알기 때문에, 유신 체제를 시작하는 한 지주의 한 사람의 역할을 했던 저 이지마는, 더 이상 국민들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모순된 사회의 모순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뒤돌아서 가지고는 그 원천을 두들긴 것입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이요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적은 10월 26일 혁명 결행 성공과 더불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해결이 보장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마디 내가 확실히 말씀해 둘 것은, 결코 저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혁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군인이었고, 혁명가입니다. 군인이나 혁명가가 정치를 하게 되면 독재하기 마련입니다. 독재를 마다하고 혁명한 지가 독재의 요인을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또, 제가 대통령 각하와의 개인의 의리를 청산하고 혁명을 했습니다만은, 대통령 각하의 무덤 위에 올라설 정도로서 내 도덕관은 그렇게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결행은 성공했습니다만은, 혁명 과업은 손 데지도 못한 채 언 50여 일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혁명 결행 못지않고 혁명 과업 수행이 필요합니다.

 

장장 19년 동안 이 나라에는 많은 쓰레기가 꽉 들어차 있습니다. 이거 설거지 안 하고 어떡하시렵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증권파동이나 4대 의혹 사건, 이것은 곧 6.3사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난 사단장으로서, 서울에 나와서 사태를 진압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때 상황을 영역하게 기억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그 의혹 사건은 국민을 우롱한 일입니다. 수없이 많은 돈을 치부를 해놓고 책임지는 놈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때 치부한 돈 한 푼도 정부에서 환수한 일 없습니다. 이래가지고도 이 사회의 정의가 살아있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걸 설거지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출범시켜가지고 이 자유민주주의가 순전하게 가겠습니까.

 

또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핵심이 없습니다. 대통령 각하가 돌아가신 이후에 핵심이 빠져버렸습니다. 중심 세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4.19이후에 사태나 마찬가집니다. 주인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가 출범하게 되면은, 힘센 놈이 와서 밀면 또 넘어갑니다. 악순환이 또 계속됩니다. 이것을 막는 것은 저는 오로지 민주 회복을 기도한 저만이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같이 협력해서, 자유민주주의 출발시켜 놓고 이것을 보호해내는데 내 역할이 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에 건국 이래 지금까지 한 번도 대통령이나 정권이 순리적인 방법으로 오고 갔던 일이 없었습니다. 요번만 해도 그렇습니다만은, 지금까지의 경우가 4.19 혁명, 5.16 혁명 이런 악순환이 거듭하는 이러한 상태를 언제까지 가져가야 하겠습니까. 

 

나는 군의 수뇌부들과 같이 손을 잡고, 이 나라의 정권이 앞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라가지고 순리적으로 오고 가고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토착화시켜야겠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만들어놓으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는 그다음부터는, 대통령이 바뀌던지 정권이 바뀌던지 국민의 뜻에 따라가지고 순리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최 대통령 각하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자유민주주의가 대문 앞까지 와있는데 문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유민주주의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회복시키는데 절대로 혼란이 올 리가 만무합니다. 자유당 때 자유민주주의를 해서 혼란이 온 게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아니하고 부정선거를 해서 혼란이 온 겁니다. 공화당 정권이 되고 난 이후에, 국민들을 우롱하는 의혹 사건을 만들어내니까 혼란이 왔지, 자유민주주의를 해서 혼란이 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나치게 급격하게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3, 4개월 5, 6개월이면 충분하지 이것이 1년 반씩 끌 아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빨리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않이하고,

 

인위적으로 자꾸 끌다가는, 내년 3, 4월이면은 틀림없이 민주회복 운동이 크게 일어납니다.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아까 말씀드렸었지만은, 지금 핵이 없습니다. 정부가 통제력이 없고 국민들은 자제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큰일을 당하면은 뭐가 될는지 모릅니다. 나는 그래서 이러한 문제가 될만한 요인을 미리미리 없애라. 이렇게 경고를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대한 입법부에 말하고 싶습니다. 진정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이라면, 국민들이 어느 정도 자유민주주의를 갈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파악을 한다면은, 나는 최소 10월 26일 혁명을 지지 결의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빨리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었을 적에 대한민국 국회는 국회의원들은 뭐라고 말을 하겠느냐. 나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뭐를 했다고 얘기할 수 있겠느냐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동안에 긴급조치 9호를 해제 결의했지만은 지엽적인 일에 불과 한 것입니다. 더 원천적인 일은 자유민주 회복하는 결의가 더 원천적인 일인 것입니다.

 

지금 모든 것을 체념하고, 내 앞일을 모든 것을 총 청산하고 가만히 눈 감고 있을 적에, 가장 염려스러운 것이, 내가 한 혁명이 원인이 되어서, 이 나라에 혼란이 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기마저 흔들리는 요인이 생길까 봐 몹시 겁이 납니다. 나는 최 대통령 각하에게 지금이라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감상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정치라는 것은 현실이고 냉혹한 것이니, 내가 아무리 밉더라도 밉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끌어내는 나와 같이 혁명 과업을 수행합시다. 그렇게 해서, 핵을 만들고 중심세력을 만듭시다. 그렇게 해서, 국가의 모든 장래를 반석 위에 올려놓읍시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얘기가 현실 분위기 봐서 받아들여질 일은 없겠지만은,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감정을 초월해서 이성으로 돌아가서, 정치 현실을 냉혹하게 보고, 정치의 전망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감상에나 감정에 사로잡혀가지고 국사를 그르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판장님, 심판관님, 여러 날 계속되는 공판에 매우 피곤하시겠습니다. 또 오늘, 지가 이 장황한 얘기를 하는 것을 경청해 주시니, 마지막 이 세상을 하직하고 가더라도 여러분에 대한 고마움은 내가 간직하고 가겠습니다. 나는 오늘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놨다. 20년 내지 25년 앞당겨 놨다 하는 이점, 이것은 누구의 뭐 하고도 바꿀 수가 없는 자부를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가 만만세가 되도록 10월 26일 민주회복 국민혁명이 만만세가 되도록 저는 기원합니다.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빨리 하직하게 됨으로써, 자유민주주가 이 나라에 만발 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그 유한이 한량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이 기약이 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못 봤다 뿐이지 틀림없이 오기 때문에, 나는 웃으면서 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심판장님께서는 소신껏 심판을 해서 저에게 알맞은 형벌을 내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제가 심판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아까 모두 나와서 최후 진술했습니다만은. 양과 같이 착하고 순합니다. 너무 착하고 순하기 때문에 저와 같은 사람 명령에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복종을 해가지고, 그 사람들 입장에서 볼 적에는 확실히 죄를 저질렀습니다. 제 입장에서 볼 때는 혁명을 했지만은,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까 최후 진술에서 나왔습니다만은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원천이 저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나는 법의 효과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하나가, 이 나라의 정보부장까지 했던 사람이, 이 사람 하나가 총책임을 지고 희생됨으로써 충분히 난 그 값어치를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에게는 극형을 주시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대해가지고는 극형만은 면해 주시도록 말씀드립니다. 특히 저 저번에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박 대령이는 현역이기 때문에 단심이라 알고 있습니다. 심판장님의 판결이 곧 저 박 대령에 대한 마지막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매우 착실한 사람이었었고 가정적으로도 그렇고 매우 모범적이고 결백했던 사람입니다. 청운의 꿈을 가지고 사관학교에 지망했던, 지금 1선발로 올라오는 대령입니다. 물론 군에서는 더 봉사할 수 없겠지만은,  여생을 사회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극형만은 면해 주시도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두서없는 얘기를 장황하게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이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와 더불어 김재규가 옥중 수양록에서 국민들에게 남긴 글도 재평가 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옥중 수양록 중 1월 27일자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자유가 병들었던 것도 우리의 노력부족과 무관심에서 빚어졌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없어지고 나서 그 귀중함을 알게 되기 쉽습니다.

자유는 우리 대한민군의 기본입니다.

이게 없으면 공산주의도 못막고 국토방위도 못하고 사회발전도, 경제발전도 복지사회도 다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무엇이 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 아니되고 맙니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암흑의 사회로 곧 지옥입니다.

자유는 남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킵시다.

"오늘은 나를 위하고 내일은 후손들을 위하여"

덕산 김재규

 

 

다음으로 탕탕절을 맞이하여 역사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할 인물중 한명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입니다. 

 

박흥주 대령에 대한 재평가 내용입니다. 

 

  1. 서울대 갈 성적이었으나 집이 가난해서 육사 진학하고 육사 성적 최상위권으로 졸업

  2. 관측장교 건너뛰고 바로 전포대장에 보임.

  3. 거기서 김재규를 만났는데 머리가 너무 좋아서 나중에 김재규가 중정부장 됐을 때 비서로 데려감

  4.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중정부장의 최측근으로 엄청난 권력을 쥐게 되었는데도 허름한 판잣집에 진짜 청렴하게 살아서 주위 평판도 무척이나 좋았음

  5. 그러나 10.26이 터지고 당시 김재규의 갑작스러운 지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살해에 가담

  6.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교도소 벽에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고 적음

     

  7. 변호사에게 김재규 거사의 업적을 상세히 알리고 그리고 아내랑 딸에게 아빠는 할 일을 한거라며, 절대로 기죽지말고 떳떳하게 살라는 유서를 남기고 사형대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사망.

     

 

당시 박흥주의 유언 내용입니다. 

"내 조국 대한민국은 희망있는 국가요 또한 그 국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대업은 조국통일이며 조국통일에 목적이 있는한 우리 국민은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민족의 새로운 번영과 발전을 이룩할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번 시련도 온 국민이 수천년에 걸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처리해온 위대한 민족혼을 발휘하여 서로 믿고 존중하며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단결하여 온 국민이 더욱 기쁜 마음으로 국가에 봉사하고 고락을 같이 하면서 이번 기회를 새로운 번영의 터전으로 삼아주길 빈다. 강한 성위요, 방패와 병기가 되신 주님께서 나를 키워주고 오늘 이 날 이 때까지 품어준 우리 대한민국 국군을 그 강한 오른팔로 지켜주시고 이끌어주서 간성으로서의 소금의 직분을 다할 것을 믿습니다.


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이들을 떳떳하게 잘 길러서 나라에 봉사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염려해주시고 애써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박흥주 대령과 더불어 박정희 암살을 도왔던 박선호 의전과장도 재평가 되고 있습니다.

 

  1. 김재규와 박선호는 박선호가 중학교 시절에 사제지간으로 만남

     

  2. 그 시기에 김재규의 인품을 보고 반해서 김재규가 군으로 복직한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꾸준히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고 평소 "거만하게 행동하지 말라" "책을 많이 읽어라" "검소하게 생활하라" 등 따뜻한 조언을 해줘서 가슴 속에 존경심을 품음

  3. 이후 이것이 인연이 되어 중정부 의전과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말이 의전과장이지 박정희 술시중 들어주는 여자나 섭외하고 있으니 독실한 크리스찬이기도 했던 박선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며 요직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 했는데 김재규의 만류로 참고 일함 

  4. 결국 10월 26일 거사 40분 전 김재규가 일방적으로 박흥주와 함께 불러 박정희를 죽이겠다고 통보했고 지시에 따르게 됨.

     

  5. 결국 보안사 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교도소에 갇히고 재판을 받게 되는데 재판 최후진술에서 김재규를 보며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닌 창공을 나는 새의 길러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다"며 눈으로 "다시 그 상황에 놓이더라도 같은 길을 가겠다"며 진술을 마침

     

당시 박선호의 최후진술 발언입니다.

김(재규) 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저로 하여금 항상 인간으로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라 창공을 나는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될 수 있도록 길러 주신 데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 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과거 배웠던 역사들이 그것도 근현대사에서 역사가 지나고 나서야 재평가 되어야 할 인물들이 많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10월 26일 탕탕절은 그 날의 역사적 의의부터 인물들까지 더욱 더 그러한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김재규가 사행집행전 유서에서 남긴 우리나라의 미래를 예언한 듯한 멋진 발언으로 마무리 합니다.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저는 먼저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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